강제적 이성애와 무성애의 섬 (feat. 수하님)

 















케이트 밀릿의 <성 정치학>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18년이었다. 이미 품절 상태였고, 친절한 알라디너님은 애인이 비싼 중고를 구해주었다 자랑하시기도 했다. 애인 없는 나는 원서를 구입해서는 2쪽 읽고 바로 고이 보관 모드로 들어갔고, <성 정치학> 2020년에 재출간되었다. 당시 책소개에 이런 문단이 있어 페이퍼에 적어 두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알라딘 책소개는 좀 바뀌어 있어서, 그래24의 책소개를 가져와 본다.


《성 정치학》은 케이트 밀렛에게 크나큰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이러한 관심에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부장제의 기원에 의문을 제기한 밀렛에게 전통적인 이성애적 가정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저명한 비평가 어빙 하우는 “이른바 시대 정신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을 대충 어지럽게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면서 “배운 티를 내려 애쓰고 있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결정적으로 레즈비언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운동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197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 도중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부터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밀렛은 힘겹게 “레즈비언”이라고 답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여성 해방의 마오쩌둥”이라며 치켜세웠던 《타임》은 “페미니스트들을 레즈비언으로 치부하는 회의론이 강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밀렛의 고백 이후 많은 진보적 페미니스트가 등을 돌렸다. (<Yes 24 책소개>)   



나는 이걸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케이트 밀릿은 레즈비언이었지만, 그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는 꺼려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의 질문에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이 책 <여전히 미쳐 있는>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게 읽힌다.


















동성애자와 여성의 해방운동에 관한 어느 모임의VER패널로 참가했을 때는 한 청중으로부터 'L 워드'를 사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500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레즈비언이에요? () 그렇다고 말해! 네가 레즈비언이라고 말해!' 라면서. 나는 네, 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니까. 마치 파시스트의 칙령처럼 융통성 없는 저 말은, 양성애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그렇다고,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 것이었다." (<여전히 미쳐 있는>, 205)



자신이 급진주의자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밀릿의 나는 레즈비언이라는 대답(206). 혹은 그러한 대답에 대한 압박은 페미니즘 운동이 불꽃처럼 타오르던 시기에 레즈비언니즘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은 이론이며 레즈비어니즘은 그 실천이라는 의식이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 전체를 좌지우지했고, ‘라벤더 위협의 힘으로 급진적 레즈비언 단체를 여성주의 운동과 분리시키고 싶어했던 베티 프린단 같은 세력의 반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런 저런 사정들로 인해 여성주의 운동가들 사이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됐다.


한국에서도 그런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화살표는 전후좌우 방향이 없었다. 남성이 여성을 검증(?)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묻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성이 여성에게 묻는 경우도 있었다. “당신 페미니스트야?” 대답은 Yes or No. 페미니스트에 대한 정의가 천차만별인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왜 당신은 대답하지 않느냐, 왜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느냐의 질문이 페미니즘의 고전을 저술한 사람에게까지 이어졌다. 밀릿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파시스트의 칙령같은 질문.




이성애는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강력한 버팀목 중 하나이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 그리고 남성과 여성과의 구별이 이성애를 떠받치고 있다. 하지만, 공기처럼 우리를 지배하는 이성애 가부장제 속에서 우리가 진짜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대답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저는 결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거짓 의식을 '세뇌당한' 상태로 헤맨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표현이 유용하거나 심오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호모포비아는 너무 널리 퍼진 용어라 이성애 페미니즘의 성적 유아론을 밝혀내고 대화를 나누기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에세이를 통해 저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이성애 경험을 비판적으로, 나아가 적대적으로 검토해 보길, 자신이 속한 제도를 비평해보기를, 여성의 자유를 위해 그 규범과 함의를 놓고 투쟁하기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제시하는 수많은 자료에 좀 더 마음을 열어주기를, 이성애 제도 안의 개인적 특권과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자는 해결책에 안주하지 않기를 요청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284)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도전은, 나의 이성애 경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남자와의 연애와 사랑과 섹스를, 그 경험을 적대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성애 제도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특권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마저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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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3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2-23 2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엄머 찹쌀떡아이스 인절미?? 맛있겠네요 ㅎㅎ
제 지인도 몇년 전에 여자가 결혼을 꼭 해야하는가, 결혼제도 안에서 여성이 입는 불이익에 대해 말했다가 상대 여성이 “너 페미니스트야?”라고 물어서(검증어조로) 황당했다고 하더군요..
단발님 화이팅!!

단발머리 2023-12-24 17:51   좋아요 1 | URL
너무 맛있다는 소식입니다! 아주 맛나요! 그런 질문들은 그래도 뭔가(?) 아시는 분들이죠. 전 은근슬쩍 이야기하면 듣는 분들이 아~~ 그런가? 그렇네… 이런 분위기에요.
독서괭님도 화이팅!! 💕🎄

2024-01-16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16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